일제식민지배 당시 만들어진 초월적인 법의 악재가 국민의 생명권 침해했다면 그 부당성은 백 여 년 세월이 지났어도 역사적 가치성으로 볼 때 국가는 거듭 재조명 진실규명을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소위 정권성립차원에서 부득이 선후를 가리지 않고, 친일지식인들을 기용 했었습니다. 이렇게 친일파 답습으로 현 정권에 이루기까지 알게 모르게 이어진 친일 세력정치 참여는, 과거 본인 가문이 멸문당한 치욕적인 일들이 묻혀 져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적으로 과거 동양척식의 토지 수용은 엄밀하게 친일파 앞잡이들과 일제와 짜고 저지른 국가 탈취 통치법입니다.

    땅을 빼앗긴 국민의 참담했던 실상을 어떻게 일일이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 아픔을 직접 당해보지 않고서는 가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한제국 나라의 국모인 명성황후는 친일파들 손에 이끌려 은밀히 잠입, 일본자객의 칼날로 처참하게 강간 살해한 용서 못할 배신이, 바로 친일파가 저지른 대한제국역사의 단절이었습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입니까? 또 다시 일본이 독도를 침탈하기 위해, 2차 대전 군국시대 야망의 칼날을 가는 일본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 않습니까?, 금번 8.15 행사로 정치인들이 독도를 방문한다니까 일본 놈들이 오히려 큰소리 칩 띠 다. 이것이 친일파 세력 부작용인 대한민국 현주소입니다. 우리 가문의 땅과 삶의 터전을 점유하고 자기 것인 냥, 아무 일도 없는 듯 주인행세를 하는, 현재 청주의 충북대학 재산점유권행사를 하고 있는 국가와, 실제 개인 점유자가 조상의 땅을 찾겠다고 주장하는 본인의 동기는 일본의 독도 침탈욕망과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국가의 주체성을 잃은 100여년의 토지지적소유역사는 바로 잡아야 됩니다. 충북대학은 1913년 증조부는 일본 놈들에게 린치를 당해 후유증으로 돌아가시던 해, 일본의 동양척식이 점유했다가, 이를 다시 청주에 賣買했고, 다시 문교부로 이전되었습니다. 동양척식에 빼앗긴 것도 생명경시 한이 맺힌 통분이거늘, 어찌 청주시에서 다시 동양척식에게 구입했단 말인가? 올바른 국가관이라면 토지 소유자에게 반환해야 마 땅, 왜 청주시는 개인 땅을 도둑질을 했겠습니까? 바로 친일파 세력이 아니라고 감히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우리 가문은 청주 “대한제국” 당시 가선대부(從二品), 절충장군을 겸하셨던 사진의 증조부는 일본 관리를 제압하고 지명수배, 친일파에 의해 밀고 당해, 고문 후유증으로 1913년, 51세에 돌아가시면서 현재 충북대학 부지 4282평 田을 동양척식에 강제 수용 당했다. 어디 그뿐인가? 1914년 조부인 할아버지도 생활품 구입 차 집안을 돌보았던 집사에게 심부름 시켰더니, 순사와 함께 들이 닥쳐, 아편구입 누명으로 5년 동안 가족들은 생사도 모른 체 일본 감옥투옥,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가문의 전통과 토지조사의 월권으로 재산과 땅을 동시에 잃어야만 했다.

   옥에 계시는 동안 “생사의 통고”도 없이 할아버지는 5년 옥고를 치른 후 귀국해보니 다른 사람 이름으로 넘어간 토지를 바로 잡아 달라는 요청은 관청에 의해 단절되었고, 오히려 정신병자로 모는, 혹독하게 멸문시킨 식민지배 충격은 할아버지, 아버지 대(박정희 정권 당시) 까지 정신적인 피해로 이어졌으며 말로만 듣던 가혹했던 짧은 역사의 실체를 3대째인 본인에 이르러 최근 수년전부터 과거 실상을 조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해 전 충북대학 도서관에서 자료 수집을 하던 중 담당 직원에게 우리조상 땅 일부가 충북대학교입니다. 했더니 시청에 가서 알 아 보 세 요. “네 알았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면 과거 토지점유법 기한에 발이 묶입니다. 그러나 시대를 넘어 부적법 선행 원인 행위가, 친일파 세력 통치에 의한 잔인한 생명 경시에 있었다면,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는, 100여 년 역사를 다시 넘어 기본권을 기립시켜 주어야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대한민국의 떳떳한 정통성을 이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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