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무척 아름다운 양귀비,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은 없는 양귀비에 대한 이야기를, 일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느닷없이 집안 일을 돌보았던 집사와 함께 들이 닥친 순사들, 할아버지가 아편을 구입하라 시켰다고 억지 죄를 물어, 일본으로 구속해 가면서 가문의 멸문은 시작 되었다.

일정시대 나라 빼앗긴 아픔은 어찌 우리 가문만이 있었겠는가. 송두리체 가문의 땅과 재산을 빼앗긴 너무 큰 충격은 지금까지도 전율이 이어진다. 증조부는 1861년~1913년을 청주에서 고조부에 이어 절충장군의 입지와 가선대부까지 겸하는 문과 무를 겸비 하셨다.

대문을 3개를 열어야 커다란 본체가 나오는 전통가옥에서 사시면서 청주 중심가는 물론 충북대학 상당부분을 포함 연기 공주 지방에도 많은 땅을 소유했었다. 증조부는 일제 토지조사 즈음 1913년 순사를 내쳤다고 지명수배 후 체포, 린치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그 후 호주가 된 조부인 할아버지는 집을 돌보는 집사에게 일상적인 생활품을 사오라고 돈을 지불했는데, 느닷없이 순사와 함께 아편을 사들고 들어와 할아버지가 구입 지시했다고 누명을 씌워, 투옥 일본에서 5년 동안 옥고를 치르셨다.

투옥 동안 일본은 가족에게 일고의 통보도 없었고, 5년 동안 행방불명 상태로 가장이 없는 일제치하 거센 파고의 시기를 맞으며 가문의 전통과 많은 재산과 땅을 잃어야만 했다. 할아버지는 출옥 후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해 잠식당한 관청을 찾아다니며 무던히 노력 했으나 투옥 때 모진 고문과 심약한 심신 상태로 부당함을 고하며 빼앗긴 땅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 오히려 정신병자로 내몰아 땅을 찾는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이 때 받은 충격으로 할아버지는 더 깊은 심약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할아버지가 5년 옥고를 치르는 동안 할아버지 대신 집안의 가장으로서 재산 보존을 하지 못한 할머니 자 잘못도 있겠지만 할머니 배경은 이러했다. 증조부는 외아들인 할아버지의 며느리를 구하기 위하여 전국팔도에 방을 붙여 며느리 선택의 조건을 다산과 건강한 미인의 조건으로 어렵게 모셔 왔다고 한다.

이렇게 선택된 옥구임씨 任玉枝 할머니는 억세고 거친 성격으로 인해 가문의 불화를 일으켜 증조부로 부터 3번이나 친정으로 되돌아갔었으며, 옥고를 치르는 동안 가문을 돌보기보다 친정의 사주로 일부의 땅 문서와 재산을 빼돌린 장본인이도 하다.

일제치하 누구나 격어야 했던 고통이지만 특히 우리 가문은 풍지박살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1913년 증조부가 돌아가시던 해 일본 놈들에 의해 린치를 당한 증조부의 앞 이빨이 빠진 사실은 당시 얼마나 가혹한 린치이었던가. 땅을 빼앗기고 시신조차도 내 땅에서 다시 파내 연기군 월산리 야산, 모셔졌으니 말이다.

이는 훗날 화장을 하면서 사실로 들어 났으며 현재 살아계신 대당숙부가 직접 화장을 한 장본인이시다.( 우측사진설명으로) 주인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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